[송원재의 학교밖에서] 국가 지도자의 '공감능력' 권장사항 아닌 필수사항
윤대통령 공감능력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고위 공직자의 공감능력은 업무수행에 불가결한 요소다.
누군가는 이를 '공감의 의무'라 불렀다. 백번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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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의 '공감능력'이 연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집중호우로 서울이 물에 잠기던 날,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일가족이 희생된 반지하방 앞에서 "퇴근하면서 보니까 우리동네 아파트도 침수됐더라"고 한 말 때문이다.
그 말에서는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인간적 연민이나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의 죄책감이 묻어나지 않았다. 무심코 던진 그의 한 마디는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나와는 상관 없는 일에 대한 제삼자의 태평스러운 논평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TV 화면으로 이 광경을 지켜본 시민들은 "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국가 지도자의 공감능력 부재가 가져온 불행한 역사는 결코 적지 않다. 마리 앙트와네트가 파리의 빈민들에게 던졌다는 "빵이 없으면 사과와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한 마디는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당겼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몇 시간이 흐른 뒤 부스스한 모습으로 나타난 박근혜 대통령은 "구명조끼를 입었다는데 구조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한 마디를 던졌다가 사람들의 억장을 무너뜨렸고, 마침내 사상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이 되었다.
윤 대통령은 억울할 것이다. 하늘이 작정하고 쏟아붓는 장대비를 어쩌란 말인가? 반지하방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나라에서 반지하방에 살라고 명령한 것도 아니잖은가? 개인의 홍수 체험담 한 자락 얹은 것이 그렇게 욕을 먹을 일인가?
과연 그럴까? 윤 대통령이 공적 직위에 있지 않은 사인이라면 그 말은 맞다. 그러나 대통령이란 직위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자리다. 대통령 취임식 때 국민 앞에 선서한 그대로다. 대통령은 공직자 중의 공직자이고, 다른 모든 공직자들을 지휘하는 사람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모든 공직자들에게 지침이나 가이드 라인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대통령에게 '개인적 견해'나 한가로운 감상평은 애당초 어울리지 않는다.
대통령이라면 국가적 재난상황에서 망연자실한 국민의 불안감을 다독이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행정수단을 강구하고, 만에 하나 예상치 못한 빈틈은 없는지 살펴야 한다. 잘못한 것 하나 없이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안전선 밖으로 내몰려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 앞에서 그 절망과 고통을 함께 공감할 줄 알아야 한다.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물길 속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부여잡고 안간힘을 쓰다가 생명줄을 놓아버린 사람들 앞에서 "퇴근하다 보니..." "아파트도 침수" 얘기는 한가롭기 그지없다.
언제부턴가 고위 공직자의 공감능력 부재가 당연한 것처럼 통용된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국민이 위임한 공적 권력은 개인의 이익을 취하는 사적 수단으로 전락했고, 공적 지위는 개인의 기회를 확장하는 전리품이 되었다. 공과 사의 경계가 무너졌으니 선을 넘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고위 공직자의 공감능력은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데에 불가결한 요소다. 공직자는 개인의 울타리를 벗어나 구성원 다수의 영역을 살펴야 하고,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구성원의 영역까지 눈길을 넓혀야 한다. 그래야 타인의 삶과 접점이 생기고 서로 감정과 생각이 오갈 수 있다. 소통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일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고위 공직자의 공감능력은 권장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에 가깝다. 누군가는 이를 가리켜 '공감의 의무'라 불렀다. 백번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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