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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50년간 제자사랑 실천하는 '초원장학회'의 이주영 선생님

'하루 10원 모으기'로 1974년에 시작한 장학회
초원장학회 표어는 ‘생활은 검소하게 마음은 여유 있게’
교사들이 개인 장학금을 만들거나, 퇴직금을 떼어 장학금 만들기도

현경희 편집실장 l 기사입력 2024-02-2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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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원장학회 이사장 이주영 선생님     ©현경희 편집실장

 

[편집자주] 최초 교육무크지 <교육현장>,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어린이도서연구회, 초원장학회 등 여러 교육매체와 단체를 만들어 평생을 참교육 운동에 앞장서고 매진하셨던 이주영 선생님.

 

퇴직 후에도 교육운동을 이어가시는 선생님을 만나, 50년 가까이 제자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초원장학회’를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해 보았다.

 

Q. 선생님, 반갑습니다. 현재 초원장학회 이사장으로 계시며 여전히 교육운동을 하고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초원장학회가 만들어지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장학재단 초원장학회는 1974년 서울고척초등학교 6학년 주임교사였던 유승룡 선생님이 동학년 동료교사 5명과 어려운 제자들을 돕는 봉사회를 만들자는 뜻을 모아서 만든 초원봉사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초원’은 푸른 풀밭에서 양과 사자가 함께 뛰어노는 성경 구절에서 따온 것이면서 ‘초등교원’이라는 의미를 중첩시킨 이름입니다.

 

초원회 정신은 ‘생활은 검소하게, 마음은 여유 있게’라는 표어에 담겨 있습니다. 무욕견진(無慾見眞), 곧 ‘욕심이 없어야 참을 볼 수 있다’는 말처럼 ‘교사들이 욕심을 버려야 참교육을 할 수 있고, 욕심이 없어야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아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이죠. 당시 봉사회 회비는 월 300원이었습니다. 나보다 어려운 제자들을 생각하면서 하루 10원 모으기를 했습니다. ‘하루 10원 정성으로 어려운 제자와 마음을 나누자’는 운동이었죠. 대부분 월 300원을 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310원, 280원, 290원을 내는 회원들도 있었고요.

 

1990년대가 되면서 월 1,000원을 내는 분들이 많아졌고, 하루 100원 모으기로 3000원을 내는 회원들도 있었죠. 90년대 전후에 서울시내 초등학교 대부분 학교에 초원팀이 있었고, 팀장이 회비를 걷어서 보냈습니다. 회원이 10,000명 정도가 되었기에 월 1,000만 원이 넘었고, 1년에 1억이 넘는 돈이 모였습니다. 그래서 1994년에 임의단체인 초원봉사회를 모(母)단체로 하여 서울시교육청에 재단법인초원장학회를 등록하였습니다.

 

2000년대가 되면서 팀장들의 명퇴가 늘어 후속 팀장을 조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게 되었습니다. 다달이 내던 초원회보를 보낼 수 없게 되면서 급속히 회원 수가 줄어 2010년 무렵에는 1,000명 선으로 떨어졌고, 현재는 200여 명이 회원으로 있습니다.

 

Q. 초원장학회 주요 사업과 사회적 기여는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첫째는 교사와 제자들 사이를 돈독하게 하였습니다. 교사들이 제자들을 위해서 다달이 단돈 1,000원이라도 장학기금을 낸다는 사실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장학생 한 명을 추천하려면 학교 대표자인 팀장이 10명 이상은 있어야 했습니다. 팀장 교사가 추천하면 별도 심사 없이 장학생으로 선정했습니다. 성적은 관계가 없었죠. 소년 가장이나 기러기 가족일 때나 학생이 긴급 상황일 때는 누구나 추천할 수 있었고, 이런 경우는 사실확인을 하고 선정하였습니다. 추천 교사가 계속 추천하면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주었기 때문에 한 번 추천하면 3년에서 6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1년에 한 번 이상 추수 지도를 하라고 하는데, 실제로 대부분 평상시 꾸준하게 제자와 연락 관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초원회가 한창일 때는 1년에 장학생 연수를 4번 했습니다. 한 번은 장학금 수여식, 한 번은 체육대회, 한 번은 문화연수, 한 번은 2박3일 숙박 연수로요. 연수는 모두 장학생을 추천한 회원 교사들이 기획하고 진행하였고, 추천 교사와 장학생들이 만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적을 때는 100여 명에서 많을 때는 250여 명에게 장학금을 주었죠.

 

▲ 2011년, 초원회 재단 강당에서 장학생 연수를 진행하는 모습  © 이주영 제공

 

▲ 2000년 전후로 초원장학회는 길림성 남평진 조선족학교 도서관을 지원하는 사업도 벌였다.   © 이주영 제공

 

둘째는 어려운 재외 동포 자녀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2000년대 전후 10여 년은 국내뿐 아니라 동북 3성이나 중앙아시아 동포 학생들에게도 장학금을 지급하였죠. 초등학교는 흑룡강성에 김좌진 장군이 설립한 학교가 어렵다고해서 학교 운영비를 보냈고, 중고등학교는 연변제1중 교사가 초원지회로 희망장학회를 조직했는데, 연간 50명씩 장학금을 지원했습니다. 대학생에 대한 요청이 있을 때는 회원 한 명과 결연을 맺어, 1년 장학금을 개별 특별회비로 냈습니다. 보통 연간 60만 원에서 100만 원 정도였죠. 한 번 결연하면 졸업할 때까지 해 주었고, 한국으로 유학을 오면 재단 건물에 기숙사를 만들어 학교 기숙사로 들어갈 때까지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당시 한국으로 유학 왔던 학생들 가운데는 학업이 끝나고 돌아갔으나 한국에 남는 경우도 있었거든요. 미국으로 가면 초원봉사회 자매단체인 재미교포들이 만든 동북아장학재단에서 유학 기간 동안 지원을 했습니다.

 

셋째는 퇴직 교원들에게 개인 장학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교원들이 개인 장학재단을 만들기는 어렵잖아요? 그래도 한평생을 교단에서 생활한 분들 중에서는 장학금을 만들고 싶어 하셨죠. 그런 부탁을 받아서 만든 것이 개인장학금입니다. 개인이 1,000만 원 이상을 기탁하면 그분 이름으로 학생 1명에게 장학금을 줍니다. 장학생은 본인이나 유족이 추천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 초원회에서 임의로 선정했습니다. 은행이자가 너무 낮아져 장학금 지원이 어려우면 재단에서 부족분을 지원했습니다. 현재 60여 분이 개인 장학금을 기탁했는데, 기본 자산 10억이 그 돈입니다. 퇴직할 때 퇴직금에서 뚝 떼어서 내신 분도 있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자녀가 부조금에서 떼어서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돈이 되는 대로 2∼300만 원씩 분납해서 내시는 분도 계셨죠.

 

Q. 기억나는 사건이나 인물이 있으신가요?

너무 많아서...하하하! 장학생들이 졸업하고 사회 곳곳에서 가난하지만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일이 가장 흐뭇한 일입니다.

 

1985년인가? 강원도 정선 임길택 선생님이 Y초등교협 행사 때 오셨다가 자기 반에 김길화라는 여학생이 있는데 정선아리랑을 잘 부른다고 했어요. 중고등학교까지 계속 지원해주고 싶은데 어디 도움받을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그래서 초원회를 소개했더니 금방 학교 동료들한테 이야기해서 10명 회원을 확보하고, 탐장이 되셨습니다.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는데, 해마다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데리고 와서 장학생 연수에 같이 참여했습니다. 그 아이는 정선아리랑 전수자가 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인데, 긴급장학금이라는 걸 막 만들었을 때인데요. 누구나 제자가 위급하다고 보이면 신청할 수 있었죠. 최정인 팀장이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6학년 때 담임했던 고2 제자인데 어머니와 딸 둘이 산다고 했죠. 제자가 갑자기 뇌종양으로 수술을 해야 하는데 미리 내야하는 입원비 100만 원을 구할 수 없다고 담임선생님을 찾아왔다는 거예요. 급한 돈은 잘 살면 구하기 쉽지만 가난할수록 어려운 것이죠. 유승룡 회장님이 급히 찾아가서 상황을 확인하고, 100만 원을 주고 입원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병원장을 찾아가 수술비 1500만 원을 책임질 테니 수술부터 먼저 해 달라고 했죠. 초등학교 교사들이 ‘하루 10원 모으기’로 만드는 구호금이라는 말을 듣고 병원에서 700만 원으로 수술비를 깎아주었습니다.

 

그런 사연을 월 회보에 실었는데 회원들이 특별 성금을 낸 게 딱 그 금액이었습니다. 90년대 초라 700만 원이 적은 돈이 아니었는데 회보가 나가자마자 채워진 것이죠. 넘치지도 않고 남지도 않게. 그 아이는 수술이 잘 돼서 살았는데 비슷한 조건이었던 다른 학생은 돈을 구하느라 2주 늦게 수술했는데 수술 시점이 늦어 죽었다고 해요. 우리 모두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 뒤로도 긴금구호금 신청이 여러 건 있었는데 그때마다 기적처럼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한번은 퇴직 회원 한 분이 어르신들 문해교육을 1년 동안 무료로 했는데, 어르신들이 연말에 굳이 20만 원을 모아서 주셨다고 해요. 필요한 데 있으면 보내달라고 하시면서. 그래서 어디로 보낼까 생각하고 있는데 다음날 전북 회원인 윤일호 선생 전화를 받았어요. 자기 반에 부모가 다 나가고 할아버지하고 둘이 사는 아이가 있는데, 겨울 연탄비가 20만 원이면 되는데 지원해 줄 수 있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후원금 출처를 이야기하고 흔쾌히 보냈죠. 이후 그 선생님께 이렇게 썼다고 전했고, 이를 전해들은 어르신들이 너무 좋아하시면서 고맙다고 하셨다 합니다.

 

▲ 2024년 2월, 초원장학회 정기이사회 모습  © 이주영 제공

 

Q. 현재 초원장학회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나요?

현재는 다른 활동은 못 하고 만 원 정도 회비를 내는 200여 명 회원들의 회비와 개인장학금 기탁 10억과 오피스텔 임대료 포함 약 3,000만 원으로 60명 내외 초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에게 생활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전년도 수입을 모아서 그 규모에 맞게 다음 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어요. 2월에 교육청에 예결산 보고를 해서 승인을 받으면 그 숫자만큼 장학생을 선정해서 5월에 지급합니다. 연수는 대학생만 연 1회 하고 있고요. 서울 은평구에 있는 고아원과 협력해서 18세가 넘어서 고아원을 나와 독립한 청년들이 취업이나 대학 진학을 위해서 학원에 다니는 경우도 생활장학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재단 건물 2층은 면역결핍증 환우들이 모임방으로 쓸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고, 1층과 지하 강당은 평소에는 독서회, 그림책 모임, 종교 모임 등 주변에서 사용하고 싶은 모임이 있으면 심사해서 합당하다고 판단하면 무료 임대하고 있습니다. 이사회와 운영위원회는 전현직 퇴직 교육자들이 맡고 있고, 운영 실무는 오랫동안 초원 회원이었다가 퇴직한 사람들이 자원봉사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Q. 초원장학회는 선생님께 어떤 의미의 단체인가요? 

‘생활은 검소하게 마음은 여유 있게’라는 초원 표어가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79년에 동료교사 소개로 초원회에 가입해서 회비를 내는 정도였는데, 6학년을 담임할 때 가난한 제자들을 초원 장학생으로 추천하고 싶었죠. 네 명을 추천하려고 보니 회원 40명을 확보해야 했어요. 돈 1,000원이지만 달마다 걷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동료 교사들한테 평소 친절하게 잘해야 했죠, 하하하! 4명을 추천해서 고등학교까지 6년 동안 초원 장학금을 주었고, 한 명은 대학 입학금까지 내주었습니다.

 

유승룡 회장님이 개인봉사 통장을 만들라고 하셨는데, 평소 생활하면서 조금 불편해도 참고 아껴서 모은 돈이나, 내가 차나 식사비를 내야 하는 자리인데 굳이 다른 사람이 내거나 하면 그 돈을 모아두는 통장이었죠. 그 통장에 모아둔 돈은 제자들이 필요하다고 하면 조건 없이 도와주는 개인기금이었죠. 그 돈으로 입학금을 대주었고, 그 다음 학기부터는 장학금을 지급했고요. 그 개인기금으로 제자 두 명과 친척 한 명을 도와주었습니다.

 

저는 초원회에서 주로 기획 실무를 했습니다. 80년대 초에는 장학생 연수를 처음 기획해서 담당했고, 회보 편집을 했고요. 전교조 결성으로 해직된 교사 자녀들 30여 명을 선정해서 해직기간 장학금 지원을 했고, 2000년대 전후에는 동북 3성과 중앙아시아 교포 자녀들 장학금 지원을 기획과 현지 조사를 담당했었습니다. 2010년 말기암 판정을 받아서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쉴 때 초원 업무도 놓았다가, 2023년에 이사장을 맡아서 재정비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초원봉사회와 장학회 일을 하면서 유승룡 회장님과 회원들을 통해서 교사로서 가장 기본인 봉사하는 삶을 배웠습니다. 저는 많은 단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초원은 가장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는 고향과 같은 곳이죠. 그래서 초원장학회가 안전하게 지속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현재 보수공사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 본인이 제작에 참여한 <연극 전태일>과 <손바닥 헌법책>을 89차 전국대의원대회장에서 후배 조합원들에게 홍보하는 이주영 선생님  © 현경희

 

Q.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교육운동’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저는 교육운동이란 교사가 '교사답게 사는 세상을 찾아 나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찾아 나가는 길이다라구요. 이때 교사가 갖추어야 할 품성이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째가 봉사, 둘째가 연구, 셋째가 정의.

 

교사는 바탕에 봉사하는 마음과 실천하는 의지가 있어야 학생들을 온전하게 품어줄 수 있기 때문이죠. 교사는 끊임없이 스스로 배우고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고민에서 나온 말이 '배워서 남주냐?'를 ‘배워서 남주자!’로 바꾸는 것이죠. 뜻이 맞는 교사들하고 함께 공부하기 위해 어린이도서연구회와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를 만들었습니다. 교사가 ‘정의=참’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열심히 할수록 교육을 망치게 되고, 그만큼 제자들한테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제가 Y초등교육자회를 만들고, 민주교육추진 전교협에 참여하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과 활동에 나선 까닭은 우리 교육이 좀 더 정의롭고 참된 교육을 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는 ‘교육운동’ 또는 ‘교사운동’이란 내가 한번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한, 곧 ‘내 삶을 올곧게 살기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Q. 현재 교단에 있는 후배 교사들에게 전하실 말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일단 저는 지금 전교조에 가입해서 전교조 조합원으로 살고 있는 후배 교사들이 무척 고맙습니다. 1978년부터 공개적으로 교육운동을 시작했고, 10년 만에 교원노조가 부활했습니다. 35년 전 당시 황폐한 교육을 바로잡기 위해 참교육을 내세우면서 만들었지만 35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내걸었던 목표가 제대로 이뤄진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대부분 본질은 바뀌지 않고 형식만 변형되었기 때문에 그 비틀어짐이 심하고, 그만큼 교육 현장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외적인 문제해결을 위해 달려오다 보니 내적인 성숙이 충분하지 않아서 겪는 어려움이 큰 게 아닐까 염려됩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옛 속담이 있습니다. 너무 눈앞의 문제만 보려 하지 말고, 길고 멀게 보면 좋겠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생활은 검소하게 마음은 여유 있게’를 주문처럼 외우면서 ‘교사로서 교사답게 살기 위한 길’을 천천히 굳세게 끝까지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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